이야기

가이오트의 선택 - 테트리스 보드게임

전설적 존재 테트리스 비디오 게임의 영광을 보드게임으로

2024-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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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필자는 20대까진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하여간 30대 즈음부터는 보드게임 업계에 종사하며 19년간 덕업일치의 외길을 걸어왔다. 박지원이란 이름보다는 가이오트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보드게임 플레이어. 그의 반쯤은 사사로운 보드게임 이야기를 들어보자. 
 
"전설적 존재 테트리스 비디오 게임의 영광을 보드게임으로..."
 
 

테트리스 비디오 게임. 떨어지는 퍼즐 조각을 조작하여 빈칸 없는 줄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테트리스>가 역사상 가장 성공한 퍼즐 비디오 게임이라고 생각한다. 공식적인 판매 기록에서는 <마인크래프트>가 <테트리스>를 앞질렀지만, 제대로 된 저작권과 상표권의 보호를 받지 못했던 <테트리스>의 역사를 생각할 때, 단순히 공식 판매 기록만으로 <테트리스>가 2위라고 평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것 같다. 일단 한정된 공간에 무언가를 채우는 활동을 할 때, 사람들이 “이거 완전 테트리스네”라고 말하는 것을 정말로 자주 본 경험이 있다. <우봉고>같은 게임을 할 때는 물론이고, 게임과는 상관 없는 여행 트렁크에 짐을 최대한 많이 넣기 위해 배치하는 상황에도 사람들은 <테트리스>를 말하곤 한다. 퍼즐 조각이 위에서 하나씩 떨어지는 ‘낙하형 퍼즐’이라는 형식을 사용하지 않고 폴리오미노를 사용하지 않아도 사람들은 <테트리스>라고 한다. 엄밀하게 말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틀렸지만, 그만큼 <테트리스>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강한 인상을 남겼는지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는 될 수 있지 않을까?
 

테트리스의 원작자 알렉세이 파지트노프 작가
 
이렇게 대단한 <테트리스>를 보드게임으로 만들면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또 <테트리스>에 영감을 준 폴리오미노 퍼즐은 원래 디지털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기에, 보드게임에서 활용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기도 하다. 낙하형 퍼즐이라는 형식을 살리지 않아도, 폴리오미노를 가능한 한 빈틈 없이 채워 넣는 형태의 보드게임에 ‘테트리스 보드게임’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같은 게임에 테트리스라는 이름을 쓰지 않는 것보다는 잘 팔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원작의 느낌을 살려서 제대로 만들어보려면 의외로 벽에 부딪히는 것이 <테트리스>이다. 게임 화면 그대로 구성물로 옮기기만 하면 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안되는 부분이 꽤 많다. 일단 한 줄이 가득 차면 지워지는 것을 구현할 수 없으며, 테트리미노의 수직 낙하는 구성물을 잘 만들면 구현할 수 있지만 대신 낙하 중 좌우 이동이나 낙하 중 방향 전환은 구현할 방법이 없다. 이들을 구현하려면 퍼즐 조각이 위에서 떨어지는 것을 포기해야 할 것이다.
 

알렉세이 파지트노프 작가가 만든 테이블 테트리스
 
그러다 보니 <테트리스> 이름 달고 나오는 원작 <테트리스>와는 다른 특성들이 눈에 띈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테트리스>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보드게임들은 <테트리스>의 상표와 디자인 원칙만 가져오고 원작과는 다른 재미를 추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특히 원작 <테트리스>를 만든 알렉세이 파치트노프 작가가 만든 <테이블 테트리스>를 보면 <테트리스>의 풍미를 살리는 것 보다는 <테트리스>의 분위기만 가져오고 보드게임이란 형식에 맞는 게임을 만드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을 원작자도 인정했다는 인상을 준다. <테트리스>의 핵심일 수도 있는 낙하형 퍼즐이라는 형식을 버리고 테트리미노의 형태과 고유의 색만 유지했으니 말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인 <테트리스 보드게임>은 조금 독특한 작품이었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테트리스> 원작 비슷한 재미에도 근접했고, 그 동안의 <테트리스> 관련 게임들이 보여주지 못했던 새로운 재미까지 듬뿍 담았다. <테트리스>를 기반으로 만든 보드게임에 대한 내 기대보다 훨씬 근사한 작품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에 규칙서에 언급된 작가 이름을 봤더니 ‘필 워커 하딩’이었다. 이 작가는 호주를 대표하는 보드게임 작가로 유럽에서 통하는 수준의 보드게임을 만들 수 있는 실력이 있는 작가이며, 특히 간단명료한 규칙을 가진 게임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작가다. 그러나 이 게임의 패키지는 이 대단한 사실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보통 요즘 보드게임이라면 의례 제목 위에 작가 이름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이 게임은 보드게임 전문 취미인을 겨냥한 게임이 아니고, <테트리스>라는 이름을 빌어서 판매점에 진열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게임이라고 말하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나 홀로 게임의 규칙을 익히기 위해 진행한 순간에도 이 게임의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곱씹을수록 필 워커 하딩 작가다운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 워커 하딩의 <테트리스 보드게임>’이라는 제목을 달고 나와도 될만한 게임이지만 그냥 <테트리스 보드게임>이 되어 나온 이 겸손한 게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만 해 보겠다.
 

테트리스 링크. 위에서 떨어지는 퍼즐 조각이라는 요소는 잘 구현했지만, 테트리스 비디오 게임과는 좀 다른 느낌을 준다.
 
이전에 <테트리스 링크>라는 보드게임이 있었다. 이 게임은 위에서 떨어지는 테트리미노를 구현했으며, 주사위를 굴리고 주사위가 가리킨 테트리미노를 떨어뜨리면서 진행하는 게임이었다. 게임의 테트리미노는 현대 <테트리스>의 테트리미노 고유 색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각자에 종속된 색이었다. 원작 <테트리스>와 달리 <테트리스 링크>는 모두가 하나의 판을 공유하며 진행하며, 게임의 목표는 줄 완성이 아니고, 자신의 테트리미노들을 끊어지지 않게 잇는 것과 잘못 떨어뜨려서 생기는 확정적인 빈 칸을 가급적 안 만드는 것이었다. 확정적인 빈 칸을 만들지 않는 것은 원작 <테트리스>에서도 중요하니 그렇다 쳐도, 여러 명이 판 하나에 서로의 테트리미노를 떨어뜨리면서 자신의 테트리미노끼리 연결하는 게임이라는 것은 <테트리스>와는 많이 다른 느낌을 주며, <테트리스>를 아는 사람에게는 이상하다는 느낌까지 준다.
 

필 워커 하딩 작가가 만든 테트리스 보드게임
 
그런데 그걸 꼭 이상하다고 볼 것만은 아니다. 각자가 게임판을 가지고 각자의 게임판에 테트리미노를 떨어뜨리는 형태의 <테트리스> 보드게임을 만들면 그 게임은 아주 심심하고 별 것 아닌 게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원작 <테트리스>가 도전적이고 재미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테트리미노의 낙하 속도가 점점 빨라졌기 때문이다. 이런 압박이 없이 10초 이상 생각할 시간이 주어지며 자기 게임판에서 테트리미노를 떨어뜨리며 가능한 빈 칸 없이 쌓는 게임이 있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테트리스 링크>는 모두가 함께 사용하는 게임판에서 자기 테트리미노를 연결하며 나가는 <블로커스> 비슷한 느낌의 게임이었지만 그 의미를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각자가 자기 게임판에서 테트리미노를 쌓는 형식의 게임을 만들려면 그에 맞는 적합한 압박도 같이 주어져야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이번 차례에 어떤 블록을 떨어뜨려야 하는지와 다음 차례에 어떤 블록이 나오는지가 카드로 표시된다.
 
필 워커 하딩 작가가 만든 <테트리스 보드게임>은 각자의 게임판에서 각자의 테트리미노를 떨어뜨리며 진행하는 원작 <테트리스>의 규칙에 좀 더 가까운 게임이다. 흥미로운 것은 테트리미노가 표시된 카드 더미에서 카드를 펼치는 것으로, 이번 차례에 놓을 테트리미노와 다음 차례의 테트리미노를 같이 볼 수 있게 된 것도 원작을 재현한 것이다. 모두가 테트리미노를 놓으면 다음 테트리미노로 넘어간다. 즉, 모두가 같은 순서로 테트리미노를 놓게 되며, 카드 더미는 7종류의 테트리미노 카드 4장씩으로 이루어져 있고, 게임 중 모든 카드가 사용된다. 즉, 모든 테트리미노가 정확히 4번씩 등장한다. 디지털 원작과 달리 정사각형 4개가 길게 연결된 형태의 퍼즐 조각이 조금 밖에 나오지 않아서 망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특별한 도전이나 압박을 제시하지 않으면 각자가 자신의 테트리미노를 놓는 형태의 게임은 매우 심심한 게임이 될텐데, 대체 무엇때문에 이 사람은 이 <테트리스 보드게임>을 극찬하는가?’아니면 ‘모두가 같은 테트리미노를 놓기까지 하면 옆 사람 보고 따라하는 플레이도 가능할 텐데 이건 어쩔 것인가?’와 같은 의문을 가져볼 수 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이런 것은 필 워커 하딩 작가가 자신만의 스타일로 문제를 해결했다.
 

각자의 게임판에는 특정한 퍼즐 조각을 놓았을 때 보상을 제공하는 칸들이 표시돼 있다.
 
필 워커 하딩 작가가 이전에 만든 <베런파크>는 폴리오미노 조각을 가져와서 자신의 개인판을 채우는 게임이었다. 각자에게는 아이콘의 구성이 같지만 아이콘의 위치는 제각각인 고유한 게임판이 제공되며, 각자는 차례에 폴리오미노로 이들 아이콘을 덮을 때,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각자의 아이콘 위치가 다르기에 폴리오미노를 놓는 설계가 저마다 다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은 덤이다. 이 <테트리스 보드게임>에도 이와 거의 비슷한 방식이 적용됐다. 각자의 게임판에는 여기 저기 테트리미노 아이콘이 표시되어 있는데, 해당 테트리미노를 이 표시된 칸에 놓으면 점수를 얻는다. 각자의 아이콘 배치는 다르므로 옆 사람 따라하는 행위는 원천적으로 봉쇄된다. 만약 이 게임이 낙하형 퍼즐 형태를 포기했다면 사실 게임판의 테트리미노가 인쇄된 칸의 배치를 보고 최적의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윤곽선을 그린 뒤, 해당 테트리미노가 나올 때마다 윤곽선에 맞춰 놓는 식으로도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테트리스 보드게임>은 비록 낙하 중 좌우 이동이나 낙하 중 회전은 구현되어 있지 않지만, 원작의 낙하형 퍼즐 형태를 적극 활용하고 있기에 이상적인 윤곽을 그릴 수 있다 해도 그대로 배치할 수가 없다. 임기응변은 물론이고, 취할 것은 취하면서 내줄 것은 내주는 선택도 필요한 것이다.
게다가 모두가 게임판 하나를 공유하는 게임일 때는 가로줄의 완성에 점수를 매기는 것이 어쩐지 어색하고, 완성할 때마다 따로 체크하지 않으면 누가 언제 가로줄을 완성했는지를 추적하렵다. 그러나, 이 <테트리스 보드게임>처럼 각자가 자기 게임판을 사용하는 방식이라면 게임이 끝난 뒤에 완성된 가로줄을 세기만 하면 된다. 또 가로줄을 잘 완성한 사람이 점수를 받는 것은 원작 <테트리스>와 비교할 때 합리적이다.
 

카드의 조건을 먼저 달성한 플레이어에게 추가 점수를 제공하는 업적 카드들
 
물론 여기에는 동시에 여러 줄을 완성해서 ‘트리플(3줄을 한꺼번에 완성)’이나 ‘테트리스(4줄을 한꺼번에 완성)’에 성공한 사람에게 점수 가중치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다. 필 워커 하딩 작가는 이 부분에 대한 대책도 만들었는데 신기한 것은 여기에서도 그의 이전 작품 <베런파크>의 향기가 났다는 점이다. <베런파크>의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업적이었다. 이는 특정한 조건을 빨리 달성한 사람이 추가로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수 있는 수단이었는데, 흥미로운 점은 빈틈 없이 꼼꼼하게 채울수록 유리한 <베런파크>에서 일부 업적 카드는 비효율적으로 게임을 진행한 플레이어에게 오히려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이었다. 이로써 게임의 ‘정석’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파격적인 시도를 해 볼 가치가 생기며, 매 게임 다른 업적 카드를 사용하기 때문에 게임을 할 때마다 다른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테트리스 보드게임>도 정확히 같은 역할을 하는 업적 카드가 등장한다. 이 중 일부는 <테트리스> 원작에서 높은 점수를 얻는 상황을 재현한 것이고, 또 일부 업적 카드는 약간의 비효율을 감수하는 대신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는 역할을 한다. <베런파크>의 업적 카드와 정확히 같은 기능과 같은 장점을 가지는 것과 동시에, 원작에서 고득점을 얻을 수 있는 상황도 일부 반영한 것이다.
<테트리스 보드게임>은 그 동안 나온 어떤 <테트리스> 보드게임과 비교할 때, 보다 더 원작에 근접하기도 하면서 그 동안 <테트리스> 보드게임에서 느끼지 못했던 재미까지 강렬하게 느껴졌다. 또 곱씹어보니 예사롭지 않은 보드게임 작가의 예사롭지 않은 노하우가 가득 담겨있었다. 역시 명장의 손길은 달랐다는 것을 느꼈다.
 
글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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